세상 끝에서 만난 추모 콘서트

3월 24일. 오늘은 공휴일이다.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시절 희생된 사람들(약 3만명)을 추모하는 날. 진실과 정의를 회고하는 날이라고 한다. 아르헨티나는 예전에 우리나라는 지금 꿈꾸기도 힘든 복지 정책이 시행된 적도 있고 또한 근래에는 중요한 공기업을 모두 외국에 팔아먹은 대통령도 있다. 지금은 이런 저런 복구 작업을 하고있고 무엇보다 군사독재 잔재의 청산도 진행중이다. 칠레에 비하면 복잡한 정세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보단 나은 점도 많다.

오늘은 시내버스를 타고 바다 근처에 내려서 혼자 마냥 걸어갔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사실은 그냥 바다 끝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리고 싶었다. 1시간 정도 걸어가서 자리를 잡고 난 앉아서 혼자 이야기를 했다. 나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동안 쌓였던 고통과 슬픔을 모두 던져버렸다. 그리고 나에게 부탁한 친구들의 슬픔도. 내용은 모르지만 버려줄 수는 있으니까. 세상의 끝에서 슬픔을 버려달라고 부탁한 사람들, 중요한건 그들이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사실. 역시나 독특하고 아름다운 산맥과 언덕의 색깔, 비록 파타고니아의 강한 바람을 맞으면서 걸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어찌나 가뿐하던지.

우표를 사고 집에 들어와서 엽서를 쓰기 시작했다. 한 두명이 아니니 조금 힘들다. 여행 초반 처럼 감성적이지도 않고. 그래도 세상의 끝에서 엽서를 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어쩌면 나도 그렇고 받는 사람들도 그렇고 평생의 한 번 뿐일수도 있으니까.

오늘도 역시 일다 할머니, 페드로 할아버지 그리고 로미나, 이스겔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도대체 첫 날 마트에서 산 먹거리들을 가지고 요리할 일이 없다. 여기선 실질적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두 공짜로 먹을 수 있는 곳. 그래도 눈치없이 얻어먹기만 할 순 없어서 내 재료도 같이 쓰고 요리도 하고 와인도 사와서 나눠 마신다. 저녁을 먹은 후 이스겔, 로미나와 함께 이 곳 우수아이아에 온 Victor Heredia의 공연을 보러 갔다.

"수, 오늘은 집 안에서 더 이상 얘기하기가 힘들어. 페드로는 군인이었거든. 그러니 오늘 같은 날, 내 의견을 얘기해봤자 분위기만 이상해지겠지."

자세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내 안에 점쟁이가 있는걸까? 난 도대체 이미지와 약간의 대화로 그 사람을 파악하는데 경지에 오른 것 같다. 왜냐면 이 집에 온 둘째 날, 난 페드로 아저씨가 고지식하고 옛 기억이나 영광을 못 잊는 퇴역장교가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한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면서 공연장으로 갔다.

Victor Heredia는 위대한 뮤지션이다. 몇 해 전 세상과 이별한 아르헨티나 민중의 희망이자 국민가수, 아니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가수 Mercedes Sosa 만큼 말이다. 공연은 어땠을까?

난 전율을 느꼈다. Victor의 목소리와 노래가 주는 강렬한 매력 그리고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열정적이면서도 진지한 모습에 반했다. 대학 시절 피가 다시 솟아나는듯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오늘, 아마 평생 잊지 못 할 하루가 되었다. (공연 동영상은 나중에 편집해서 올려야 겠다)

공연이 끝나고 이스겔과 로미나와 함께 맥주 한 잔을 마셨다. 여긴 일반 맥주도 이 지방 원료를 써서 그런지 맛이 다르다. 그러고보니 우수아이아와서 처음 마시는 맥주구나. 너무 시원해서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난 이렇게 세상의 끝에서 좋은 사람들과 멋진 추억을 만들어 가고 있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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