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슬픔을 버릴까?
'나에게 계속 운이 따라주는구나' 라고 느꼈던 우수아이아에서의 첫날 밤. 다음 날은 박물관 하나를 둘러보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마트에 가서 일주일 정도 버틸 식량을 사왔지만 역시 Hilda 할머니는 먹을 것을 계속 주신다. 지금 화요일 밤인데 아침은 당연하고 점심시간에도 주방에 있으면 식사를 주시니 내 부족한 식량은 일주일을 충분히 버틸 것 같다. Pedro 할아버지는 와인을 주시니 이 보다 완벽한 식사가 어디 있으랴^^ 월요일엔 가벼운 하이킹을 하고 오늘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커플 '로미나', '이스겔' 그리고 '일다' 할머니와 근처 바닷가로 놀러갔다. 할머니는 소풍을 가는 어린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우리에게 계속 마을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신다. 알고보니 내가 가려던 일본인 숙소의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와도 아는 사이. 우수아이아는 그저 세상의 끝이라는 딱지만 생각하면 볼 것 없는 도시라고 느낄 수 있지만 천천히 바라보면 매우 아름답고 조용한 마을이다. 이런 곳에는 비싼 호스텔(우수아이아는 어쩌면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비싼 물가;;)에서 돈 걱정하며 머무는 것 보다 이렇게 가정집 숙소에서 내 집처럼 편안하게 쉬는 것이 훨씬 좋다. 여행이 익숙해지면 여행자들이 몰려있는 호스텔에서 머물며 그 곳의 멋진 경관을 보는 것이 지겹고 피곤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난 항상 변화를 준다. 가정집 숙소에서 머물며 현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멋진 친구들을 사귄다.
어제는 '인셉션'도 봤고 오늘부터 다시 아르헨티나 및 남미 영화들을 보고 있다. 바릴로체에서 만났던 누나가 준 '제인 구달'의 책도 읽고 있다. 트위터나 포털사이트 등에서 가끔 한국 소식을 접하지만 자세히는 모른다. 그리고 다시 프로그래머로 돌아갈 수도 없다(그러지도 않을테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트위터에서 읽혀지는 세상과 페이스북에서 올라오는 친구들의 세상은 답답하기만 하다. 내가 그리워하는건 사람들이 아니라 편안한 가정일지도 모르겠다.
여행이 주는 설레임의 삶은 나에게 행복함과 더불어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보람과 자신감을 얻게 해 주지만, 이제는 남은 인생을 같이 여행할 동지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내가 얻은 넓은 시선과 마음, 자신감이면 이제 만족할 때가 온 것 같다. 어떤 형태로 돈을 벌면서 살지 아직 모르지만 점점 그 불안감이 사라지고 있다. 스무 살 이후 나 자신을 사랑했던 적이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얼마나 멋지고 자유로운가! 살면서 가장 자괴감에 빠지고 돈이 없을 때 떠난 짧은 여행, 이제 여기 세상의 끝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깨달음을 하나씩 얻고 있다.
내가 이 곳에 오자 왕가위의 영화 '해피 투게더'때문에 울었던 친구가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하지만 난 그 등대에 갈 수 없다. 등대에 내릴 수도 없을 뿐더러 투어로만 그 등대를 지나칠 수가 있다. 가격을 떠나서 난 여기서 투어를 할 생각이 없고, 그렇게 배로 지나가면서 그 등대를 바라보며 사람들의 슬픔을 버리기는 싫다. 오늘 항구에서 이것 저것 알아보았지만 등대만 갈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그 친구에게 미안하지만 난 오늘 해피 투게더의 등대를 포기했다.
그리고 내일 나만의 장소를 찾아 걸을 생각이다. 버스를 타고 마을 끝까지 가서 바다를 따라 걸어간다. 마음에 드는 장소가 나오면 걸음을 멈추고 나와 가족, 내가 선택한 사람들의 슬픔을 버린다. 돌아와서 엽서를 쓰고 보낸다.. 이것이 내 계획!!ㅎㅎ 우천시는 모레로 연기...
15년 동안 나를 가장 잘 이해해줬던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믿는 첫 번째 친구에게 오랜만에 짧은 메일을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
세상의 끝에 네가 있다는 게 난 참 기뻐. 나는 네가 언젠가는 그런 곳으로 떠날 거라고 옛날부터 믿어왔던 것만 같아.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이 문장 속에는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게 바로 지금 내가 꿈 속에 있지 않고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나만의 토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