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으로 가는 길
내가 느끼는 감정과 보는 풍경을 글과 사진으로 완벽하게 표현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지만 요즘엔 글 쓰기가 매우 힘들다. 사진은 이미 여행 전 부터 포기해서 상관없지만 분명히 여행 초반보다 일기가 내용도 없고 산만한건 분명하다. 하지만 여행도 그런건 아니다. 오히려 아르헨티나부터 나의 여행은 하루 하루가 꿈 같은 나날들이다. 어쩌면 스무 살 이후 가장 낭만적이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당연히 이 곳에 공개하지 않거나 쓰기 힘들었던 수 많은 추억들이 더 있고 내가 감동한 자연경관은 도저히 사진으로 표현할 수가 없다. 비록 블로그에 일기를 업로드 하는 일은 점점 더 귀찮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는 포기하지 않으련다.
50일 만에 혼자 떠나다
동행자는 Puerto Natales, 나는 Ushuaia로 떠났다. 밥을 안 주는 칠레, 아르헨티나 버스여행에선(물론 간단한 스낵과 샌드위치, 음료는 제공되지만;;) 항상 먹을거리를 준비해야 한다. 어제 친구가 만들어 놓았던 햄치즈 샌드위치 두 개를 챙기고 작별인사를 했다. 한달 반이나 같이 여행했으니 인사하는 것도 어색하다. 사실, 일주일 정도 뒤에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묘한 기분이 든다. 아무튼, 나 혼자 버스를 타는구나...
불의 땅
우수아이아에 도착하기까지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진다. 그냥 끝 없는 평원이니 재미없다고 할 수도 있으나 조금씩 변하는 색깔과 생소한 동물들까지 난 거의 자지 않고 창 밖을 바라봤다. 그 동안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풍경. 난 드디어 불의 땅(Tierra del Fuego)에 온 것이다. 말로 표한하기 힘든 파란색과 분홍색이 칠해진 하늘위에 떠 있는 커다란 보름달, 그 보름달은 몇 십분 뒤 동물들의 출렁임만 보이는 고요하고 넓은 바다 위에 떠 있다. 버스가 바다를 건너고 칠레 국경을 넘고 아르헨티나 국경을 들어와 우수아이아에 도착하기까지 난 그렇게 13시간 넘게 기다렸다.
세상의 끝
세상의 끝이라는 뜻의 '우수아이아'. 아래 칠레영토의 섬도 있고 남극도 있고 지구는 둥근데 무슨 끝이냐고. 그런 지리적인 개념만 가진 것은 아닐테지. 아르헨티나 북부 국경도시에 온지 거의 세 달만에 끝을 밟았으니 나에겐 더 의미가 있고 감동이 있다. 이 곳에서, 영화 '해피 투게더'처럼 슬픔을 버려달라고 부탁한 친구들이 많다. 내 슬픔, 부모님의 슬픔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슬픔을 버려주고 싶다. 그리고 엽서를 보낼 것이다. 세상의 끝에서 보낸 엽서를 받는 사람들은 얼마나 그 엽서가 소중할까? 보내는 나도 이렇게 행복한데. 정말... 내가 세상의 끝에 왔구나......
가족의 탄생?!
숙소 후보는 두 개였다. 일본인 숙소와 전에 어디선가 보고 적어놓은 친절한 할머니가 있다던 가정집 숙소. 11시 가까이 되서 도착한 버스, 호스텔 주인들이 나와있다. 듣던대로 가격은 다른 곳 보다 두 배까지 비싼 곳도 있다. 동양인 커플이 있기에 난 말을 걸었다.
"혹시 일본인?" "네, 그런데 왜요? "혹시 uenosansou 로 가실건가요?" "네? 그게 뭔데요?" "아, 이 동네에 있는 일본 가정집 숙소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미 다 돌아가셨지만 숙소는 계속 운영되거든요. 당연히 엄청 싸구요. 여기 중심가에서 10분정도 걸리긴 하는데..." "그래서, 말하고 싶은 요점이 뭔데요?" 처음부터 퉁명스러웠던 그 친구. 옆에 여자친구만 아니면 한 대 치고 싶었다. "거기 갈거면 같이 택시타고 가자구요, 지금은 버스가 없을테니." "아뇨, 저희는 알아서 할게요." 쩝, 할수 없지. 난 그냥 걸어서 갈 수 있는 후보 2번 숙소로 향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커플에게 고맙다. 너희가 만약 친근하게 대했으면 난 너희와 함께 일본인 숙소로 갔을테니까.
아무튼 '일다'할머니 숙소에 들어가자 한 할아버지가 들어오라고 한다. 할머니는 잠깐 슈퍼마켓에 갔다면서. 앗, 들어가자 마자 모두들 나를 반긴다. 아름다운 부에노스 아이레스 커플과 이스라엘 여행자들. 내가 식탁에 앉자마자 먹을거리를 가져다 주면서 이야기 꽃이 펼쳐진다. 그리고 조금 후 할머니가 오셨는데 듣던대로 매우 친절하고 순하셨다. 난 오자마자 와인과 함께 못 먹은 저녁을 해결했다. 우수아이아의 첫 날 밤, 그 식탁에서의 밤은 나를 감동시켰다. 마치 늘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고 즐거운. 이스라엘 애들은 내일 모두 떠나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과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가족처럼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생각하고 책 읽고 영화보고 쉬고 싶었던 세상의 끝에서의 생활. 비싼 일반 호스텔에서 지내기 싫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가정집 숙소라니 이게 무슨 행운인가! 이런 숙소가 여기가 처음은 아니지만 아무튼 운이 따라준 것 같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천천히 생각하면서 나에게 부탁한 슬픔들을 하나씩 버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