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남미대륙의 끝에서
파타고니아의 가을은 연일 내리는 비 때문에 더더욱 춥게 느껴진다. 약간 쌀쌀한 날씨를 즐기며 가을 풍경을 즐기기에도 조금 부담된다. 하지만 반대로 성수기가 끝난 3월, 여행자가 많이 없어 내가 좋아하는 한적함을 느끼기에는 매우 좋다. 이틀만 지내고 Ushuaia 로 떠나지만 이 곳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조용하고 어두운 호스텔. 방에 빛도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난 첫 밤에 또 빈대에 물리고 말았다. 나만 물린걸로 봐서 내 앞에서 주무시던 페루 아저씨 배낭에서 나온 놈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래도 다행히 심하지 않고 가렵지 않다. 이미 내 몸이 베드버그에 적응이 된 것일까? 이 곳은 남미여행의 백미 중 하나인 Torres del Paine 트레킹을 하기 위해 혹은 Ushuaia 로 가기 위해 하루 정도만 지나치는 곳이라고 하지만 나에겐 이 마을이 너무 이쁘다. 내가 항구 도시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마을의 색깔이 마음에 든다. 한적한 골목도 좋고 아주 산만하거나 시끄럽지 않은 중심가도 좋다. 더 오래 머물면서 쉬기에도 좋을텐데 일단, 난 일찍 떠나기로 했다.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지만 난 Torres del Paine 트레킹을 포기했다. 믿을 수 없는 풍경과 날씨를 느낄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냥 하기 싫은걸 어쩌랴. 이미 내 여행은 거의 필수 코스라고 하는 곳에 가지 않아도 아쉬운 감정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미련이 있다면 그건 내가 다시 남미에 올 수 있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비겁한 변명?!)
어쩌면(내가 세상의 끝에서 배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칠레에서의 마지막 와인을 마시고 있다. 비가 오고 추운 날씨, 조용한 거리 만큼이나 호스텔 안은 싸늘하지만 약간은 정겹기도 하다. 보람을 느끼거나 행복해 보이지 않는 호스텔 관리 청년과 Budget 여행자 냄새가 물씬 풍기는 미국커플, 귀엽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프랑스 아가씨. 나와 동행자가 식탁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고 그들은 옆 공간에서 별 의미없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하지만 내 마음에 든다. 꼭 재밌는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나, 그냥 따뜻한 소파에 앉아서 천천히 생각나는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다.
내일 아침이면, 50일 만에 처음으로 혼자 버스를 타고 다른 도시로 이동한다. 내 동행자는 또레스 델 빠이네 트레킹을 하러 떠난다. 어차피 일주일 뒤면 다시 만날테지만, 한달 반 만에 다시 혼자 떠나려니 어색하다. 이제, 블로그 제목처럼 난 '세상의 끝'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