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싶다면 바로 이 마을에서, El Bolsón

바릴로체에서 탄 버스에서 내릴즈음 난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 여기 맘에 든다. 아르헨티나 친구들이 추천해주긴 했지만 여기도 그냥 관광지일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구나. 역시 히피들이 모이는 이유가 있겠지?' 바릴로체에서 만난 누나까지 우리 셋은 관광안내소에서 숙소정보를 얻고 도미토리 가격보다 싼 오두막집을 찾아 10분을 걸어갔지만 문 닫은 집. 그래서 두 번째로 쌌던 숙소를 찾아가 가격을 깎고 오두막은 아침포함이 아니라고 했지만 아침도 포함시키고 기분 좋게 짐을 풀었다. 오랜만에 도미토리가 아닌 우리끼리 지낼 수 있는 작은 집을 얻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설프게 지어놓은 건물과 내부시설, 배고프기 전에 요리를 해야 배고파져서 식사를 할 수 있었던 최악의 주방, 돈은 비싸게 받고 대형마트 시식코너 같았던 Asado파티, 이틀째 부터 우리 방에 다른 사람들을 계속 들여 보내고 사사건건 내 행동에 신경쓰고 불편하게 했던 주인 부부. 결국 호스텔 선택은 실패였지만 같이 지냈던 이탈리아 학생들도 매우 마음에 들었고 이 마을의 매력을 잊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멕시코의 San Cristobal de las Casas, 과테말라의 호수마을(Lago de Atitlan)에서 들었던 생각이 여기서도 난다. '1년 정도 여기서 살고 싶다...'. 중심거리는 관광지분위기가 나지만 과하지 않다.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쌓인 이 마을은 높은 건물이 없어서 시야가 매우 좋고 불과 두 시간 거리지만 바릴로체와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 '나에게 먼저 인사하고 얘기를 건네는 사람들이라니... 아르헨티나 북부 이후 이게 얼마만이야!'. 비핵화지역인 이 곳엔 70년대부터 모여든 히피들이 있고 음악과 문화가 있다. 친환경 농장에서 나오는 신선한 채소들과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지역 특산 맥주들!! (아마도 귀국하면 우리나라 맥주 안 마실지도 모르겠다. 왜 그렇게 맛 없는건지;;) 아쉽게도 현지 친구를 만들 시간과 여유가 없었지만 이 곳을 지나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별 하는거 없이 보낸 시간도 많아 주변 마을 방문이나 계획했던 하이킹도 거의 못 했지만 대신 동행자 두 명과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다섯 밤을 여기서 보냈다.

* 가벼운 하이킹을 하고 내려오면서 찍은 마을 사진들을 실수로 지워버렸다ㅠㅠ
* 화,목,토에는 이렇게 광장 주위로 장이 열린다. 당연히 먹거리도 있고 맛 있는 맥주도 있다!

"혼자 여행한다고 자신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도 아니고 둘이 여행한다고 그런 생각을 못 하는게 아니더라구요. 오히려 길게 여행하다보면 생각이 단순해지고 고민자체가 없어지기도 해요." 현재 여행이 3년 째인 누나의 말. 아직 난 1년도 안 됐지만 여행이 단순해지고 고민도 없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여행을 하면 커다란 깨달음을 얻고 미래가 달라질거라 생각했던 내 바람이 잘못된 것 이었다. "여자 셋이 있는 것 같아요. 병수씨는 참 부드럽고 편안해요." 과연 그럴까? 늘 말했든 나도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모른다. 귀국하고 답답한 일상에 다시 찌들면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질까?

* 천막 극장, 이 얼마만에 보는...ㅠㅠ 그리고 클럽에서 블루스음악을 못 봐서 근처 갤러리에서 컨츄리/포크 음악을 들었다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귀엽고 재밌는 사고를 더 많이 치는 경주와 바릴로체부터 함께한 누나. 술을 좋아하는 둘과 나는 거의 매일 와인과 맥주를 마시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누나는 우리와 함께 칠레로 돌아오고 이틀 후 먼저 아래로 내려갔다. 만나서 마음 통한다고 잘 노는 것보다 마지막 헤어질 때까지 그 마음이 지속되는게 언제나 더 힘들다. 안녕.

* 24세 청년의 의문사, 공권력에 저항하는 작은 공연과 퍼포먼스 이후 거리 행진이 이어진다

파타고니아라고 모두 관광지만 있고 차가운 사람들만 있는게 아닐텐데 처음부터 내가 큰 벽을 쌓고 시작했던 것 같다. 엘 볼손 보다 더 작고 아름다운 마을들이 많을텐데 경제적, 시간적인 문제로 빠르게 지나칠 수 밖에 없어서 아쉽다. 그리고 지금 칠레의 항구도시 Puerto Montt 에는 강한 비바람이 계속되고 있다. 요리할 재료도 없는데 추워서 나가지 못 하겠다. 오랜만에 배고픔을 느낀다. 여행 중 두번 째로 부모님께 엽서를 보내고 나머지 한 엽서는 비어있다. 누구에게 보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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