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스티비 레이 본 그리고 최고의 닭요리
아르헨티나 북부의 매력
페루, 볼리비아에서 아르헨티나 친구들을 만나기 전 까진 나도 남들 가는 여정을 따라갈 생각이었다. 가이드북을 정독하거나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것에 지쳤던 나는 현지 친구들이 추천해준 아르헨티나 북부에 발을 들여놓기로 결정했다. 이런 저런 사고들과 만남들을 간직한 채 난 벌써 보름 이상 마을 순례를 하고 있다. 가지 못한 마을 두 곳(Iruya, Cachi)에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여행은 아쉬움의 연속. 아르헨티나 북부가 좋은 점은 여행자가 방문할만한 작은 마을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히치하이킹이 안전하고 일반적이라 때로는 예상치 못한 좋은 만남도 가질 수 있다. 멋진 자연경관, 상대적으로 싼 물가, 친절한 사람들 그리고 다른 대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는 원주민 문화. 더군다나 지금은 여름 성수기 시즌, 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신의 수 많은 여행자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동행자가 있었다면 같이 차를 렌트하거나 캠핑을 하면서 더 재밌는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텐데.
와인에 취하다
Cafayate는 유명한 관광지이긴 하지만 나를 만족시켰다. 이미 Salta에서 오는 길에 봤던 풍경자체가 너무 아름다웠고 자전거를 타고 하루 종일 마을 주변에 있는 산과 계곡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와인! 수 많은 와인창고와 포도밭이 있는 이 마을은 와인맛을 전혀 몰랐던 나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콜롬비아에서 커피 맛을 알게됐다면 난 아르헨티나 북부에서 와인에 눈을 뜨게 되었다. 화이트와인이 이렇게 맛있는 줄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다니!
행복했던 밤들
우연히 만난 동네 청년 '니꼬'의 소개로 난 '솔'아저씨 집에 방문했다. 이탈리아 혈통의 솔 아저씨는 그냥 보면 은퇴한 마피아 같기도 하다. 마치 20세기 집에 온 것 같다. 10년 동안 쌓인듯한 먼지들과 레코드판과 카세트테이프 그리고 오래된 책들과 장식품들. 늘 그랬든 난 이렇게 살 수 없겠지만 난 이런 집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첫 날은 그렇게 아저씨 집 앞에서 화이트 와인을 마시면서 담소를 나눴다. 다음 날은 저녁 무렵 숙소 밖 노천카페에서 니꼬와 '헤르만'을 또 만났고 그들은 나에게 맥주를 사 줬다. 1시간 뒤, 장을 보고 돌아가는 솔 아저씨가 합류했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다가 아저씨 집에서 요리를 해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내가 아르헨티나 와서 놀란 점은 이 사람들, 계속 먹는 다는 것이다. 그것도 샌드위치, 햄버거, 소고기 위주로. 덕분에 12kg가 빠졌던 내 몸은 조금씩 다시 찌기 시작했다. 당연히 뱃살 부터ㅠㅠ
솔 아저씨는 나를 위해 음악을 틀어주셨다. '스티비 레이 본', '짐 모리슨', '지미 페이지' 등등. 레코드판도 아니고 오래된 테이프와 조금만 손 대도 소리가 안나오는 민감한 오디오에서 나오는 블루스와 락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최근 믿을 수 없는 소식을 한국에서 듣고 무척 우울했었는데 그냥 다 잊고 술에 취하고 싶었다. 와인과 바게트빵을 먹으면서 음악을 2-3시간 정도 들었다. 솔 아저씨의 닭요리는 2-3시간 동안 계속됐다. 그리고 그 닭요리는 놀라울 정도로 맛 있었다. 이탈리아인의 피 때문일까 아니면 혼자 오래 살면 저렇게 되는 것일까. 난 솔 아저씨가 좋았다. 비록 내가 아저씨의 고장난 컴퓨터를 고쳐주진 못 했지만 아저씨는 내 인생 상담까지 해 주셨다. 물론 알아듣지 못 하는 부분이 더 많았지만 말이다.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같은 여행자들끼리의 만남도 소중하지만 현지 사람들과의 추억은 매우 특별하다. 기약할 순 없지만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 혹은 내가 남미에 다시 돌아온다면 나를 기억해줄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은 꼭 그 일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대단히 행복한 일이다. 난 언제나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지만 그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물론 여행자인 나와는 다른 느낌의 기억을 가지고 있겠지만 난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