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언제나 혼자가 아니야
원인모를 병에 시달리다
반년 넘게 여행하면서 그 흔한 물갈이 한 번 안했고 감기도 걸린 적이 없었는데 아르헨티나에 오자 마자 몸에 이상이 생겼다. 목과 팔에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했고 손등, 다리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르헨티나는 공공의료원이 있어서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데 여기 Salta로 오기 전에 두 군데서 주사를 맞고 약처방도 받았지만 낫지 않았다. 가렵기도 하고 몸에 상처가 남을까봐 신경도 쓰이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이 곳 호스텔에서 외래진료 의사를 불러줬는데 결국 그들은 돌팔이였다. 주사를 놓고 지금 나에게 딱 맞는 연고를 사라고 해서 샀지만 모두 돈만 낭비한 셈이었다. 난 항상 분명히 말했다. "지금 여행 7개월째고 항상 시장통에서 밥 먹어도 아무 이상 없었어요. 음식 알러지는 절대 아니라니까요. Humahuaca 호스텔이 제 방만 빼고 전부 공사중이고 페인트칠 중이었어요. 혹시 이 것과 관련 없을까요?" 주사를 세 번이나 맞고 먹는약, 바르는약에 쓴 돈을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 여행자 보험으로 실비처리가 되면 좋겠지만.
결국 공공의료원이 아닌 개인병원에 갔다. '역시, 오는 사람들의 인종 혹은 피부색 자체가 다르구나.' 기본상담비가 방값 보다 비싼 병원, 하지만 그 의사도 잘 모르겠단다. 배드버그라고 생각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며 피부전문 의사를 소개해줬다. 다음 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그 사무실로 갔다. 그 여의사는 이건 알러지도 아니고 벌레 물린 것도 아니란다. 의사는 영어를 잘 못하고 난 전문적인 스페인어 단어는 전혀 모르니 의사소통이 아주 원활하지는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 잠복되어있던 바이러스가 지금 돌출된거라는데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높은 지대에 오래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버스 사고로 몸이 충격을 받아 그럴 수도 있다고 하는데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평생 알러지나 두드러기로 고생한 적이 없는 내가 왜 지금 몸에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걸까? 아무튼 난 다시 비굴모드로 들어가 그 비싸다는 약 5일치를 공짜로 받아냈다. "수, 다음 주 월요일에도 Salta에 있으면 다시 와 봐요. 진척도를 봅시다. 무료로 진단해 줄게요."
처음 느끼는 시선들
이민자의 나라 아르헨티나. 지금까지 여행했던 라틴아메리카 나라들과 다른 문화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 나라. 그러기에 내가 여행자임에도 불구하고 차별 혹은 다른 시선을 자주 느낀다. 조롱하는 듯한 말투와 눈빛, 시비를 거는 듯한 표정 등 자주는 아니지만 느낄 수 있다. 내가 예민한걸까? 아니다. 아르헨티나의 인종차별에 대한 얘기는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인종차별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단일민족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인종차별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결국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종차별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건 분명할 것이다. 난 오히려 그들이 더 불쌍하다. 아직도 피부색이나 인종을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설득하기 전에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물론 나도 사람이다. 당하면 기분 나쁘고 상처 받는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좋은 콤비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배우인 민환씨와 무대스텝 일을 했던 나는 공통점이 많다. 비슷한 바닥에서 놀던 사람들은 서로 공감하는 이야기들과 경험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여정이라 같이 오래 못 있었지만 재밌었다. 스페인어는 못 해도 특유의 연기력과 애교로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기도 하고 생계를 해결하는 모습은 무조건 말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던 나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신경질을 많이 부렸네요, 미안해요. 올 여름에 한국에서 기분 좋게 만납시다!'
모니카
숙소에 와서 웹서핑을 했다. 병명을 검색해보니 이게 단순하지가 않다. 흔한 질병도 아닐 뿐더러 이 병으로 인해 자살한 사람도 많다. 하지만 난 열도 없고 속이 아픈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자세히 읽어보니 이미 나에게도 조금은 심각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어떤 병인지 알았으니 병원가서 더 확실한 처방을 받아보자.' 그리고 가장 큰 병원으로 갔다. 어차피 접수하고 몇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며칠 전에도 이 병원에 왔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돌아간 적이 있다. 그때 날 조롱하듯 놀렸던 젊은 의사가 내 접수를 받아주질 않는다.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주면서 지금은 담당 의사가 없으니 내일 아침 여기로 전화해서 의사를 부르라는 것이다. 무슨 소리인지 안다. 그래도 난 다시 말했다. "다 알아요, 그리고 이해해요. 지금 여기 제 병에 맞는 전문의사 없는 것도 알아요. 그래도 병을 알고 있으니 주사라도 놔줄 수 없어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그 때 환자복을 입은 '모니카'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난 내 상황을 설명해줬다. 그리고 모니카는 그 직원과 싸우기 시작한다. "도대체 접수자체를 받아주지 않는 이유가 뭐에요? 우리나라를 알려고 여행 온 사람이 몸이 아파서 병원에 왔는데 항상 이런 식으로 대하나요?" 난 그 둘을 말렸다. "모두 진정하세요, 괜찮아요. 여기 상황이 이렇다면 제가 다른 병원에 가면 되잖아요. 그만하세요." 그 의사의 눈빛과 말투를 잊을 수 없다. 난 그냥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병원들이 다 이렇지 뭐.'
모니카는 일본인 남편이 있는 주부였다. 오늘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있다고 했는데 반대편 차에 있던 볼리비아 여성은 병원에서 아무도 신경을 안 써서 하루 종일 싸웠다고 한다. '스페인어도 못 하는 일본인 남편과 함께 그 동안 힘든 일이 많았던 것일까...' 아무튼 모니카는 갑자기 남편, 애와 함께 차로 가더니 나더러 타라고 한다. "저희가 다른 병원까지 데려다 줄게요. 어서 타요, 괜찮아요!" 결국 나는 다른 병원에 도착해서 또 다시 주사를 맞았다. 그들은 내가 어리숙해서 신경써 준 것이 아니다. 그저 누구나 받아야할 권리를 누리도록 도와준 것이다. 전화번호까지 알려주면서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하라고 했던 모니카. 아름다웠던 미모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 아르헨티나의 또 다른 얼굴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