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혼자 보낸 크리스마스

볼리비아 수도 La Paz를 지나쳐 따뜻한 날씨가 그리워 찾아 온 Cochabamba. 여긴 볼 것도 별로 없고 할 것도 마땅치 않은 곳이다. 이틀 동안 여행자는 보지도 못 했다. 하지만 콜롬비아 메데진 같이 따뜻한 날씨가 너무 좋았고, 우리나라 남대문, 동대문 시장 같은 곳이 곳곳에 있어서 마냥 지루하지는 않았다.

결국 크리스마스 연휴를 여기서 보낸 셈인데, 라파즈나 다른 유명한 도시에 있었다면 더 재밌었을까?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날인데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 괜시리 뭔가 의미있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24일은 야간버스를 타고 와서 지쳤지만 동네 구경을 하면서 근처 아마존 인디헤나 마을에서 자원봉사겸 문화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을 알아보았다. 어설픈 아마존 투어를 할 바엔 내가 관심있는 부분을 직접 체험하면서 그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을거라는 생각에 혹은 보는 것 보다 중요한게 '관계'라면 이 프로그램은 지금 여기 볼리비아에서 나에게 가장 적합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비싼 돈이 들어가긴 하지만. 근데 최소 두 명 이상이 참가해야 하고 지금 크리스마스 연휴라 다음 주중이 되야 자세한 얘기를 하면서 계획을 짤 수 있는데 그러기엔 내 여정과 맞추기 힘들어진다. 일단 '우유니 소금사막'을 먼저 갔다와서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카메라도 사야 한다. 나에게 소중한 사진을 제공해줬던 Sigma DP1S는 이미 한국으로 건너갔다. 보험금을 받으려면 2-3주는 걸릴테고 그냥 필름카메라랑 아이폰으로 남은 여행의 사진을 찍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을 컴퓨터에서 실제 사이즈로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얼마나 답답하고 흐리멍텅한지. 결국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큰 시장 근처에 전자상가가 있더라. 그런데 오늘은 크리스마스.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았다. '아... 요즘 뭐 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구나ㅠㅠ' 다행히 몇몇 상점은 문을 열어서 들어갔는데 모델이 몇 개 없다. 내가 원하던 모델은 없어서 전시해 놓은 모델을 보고 근처 인터넷방에 들어가 정보를 검색해 봤다. 오히려 내가 찍어뒀던 모델 보다 괜찮은 다른 카메라들이 눈에 보인다. 그런데 가격이 서울에서 사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라파즈가 더 쌌을까? 아니면 그냥 페루에서 사는게 나았을까? 혹은 내일 모든 상점이 문을 열면 더 싸게 파는 곳이 있을까? 모르겠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던 나는 그래도 가격 비교를 전부 해 보고 가장 싸게 파는 곳에서 Sony 똑딱이 카메라를 샀다. 그래도 큰 돈이다. 이 돈이면 투어를 빼면 남은 볼리비아 여행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돈이다. 괜히 스트레스 받지 말자. 이왕 산거 잘 쓰고 한국 가서도 쓰면 되지.

24일 밤은 광장에서 하는 행사를 보다가 근처 술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그러고보니 볼리비아에서 마시는 첫 맥주구나. 마치 홍대 변두리에서 볼 수 있는 분위기의 작은 술집. 카운터에 있는 아가씨는 내가 신기한가 보다. 요즘 지나칠 정도로 말을 많이 하는 나는 결국 그 아가씨와 이런 저런 얘기까지 나눴다. "가장 두려운건 지금 이 상태로 한국에 돌아가는 거에요. 반년이 지나가는데 아직도 제 미래에 대한 준비는 커녕 목표도 정하지 못 했어요."

25일 밤은 극장에 갔다. 동네 단관에 가고 싶었는데 영화가 맘에 들지 않아서 30분 정도 걸어서 멀티플렉스로 갔다. '이제 별 거 다 하는구나. 여행이 아니라 그냥 일상인데?ㅎㅎ' 볼리비아 애니메이션을 보고 싶었지만 대부분 못 알아들을게 뻔해 '잭 블랙의 걸리버 여행기 3D' 표를 샀다. 3D라서 일반영화보다 비싸지만 그래도 아주 싼 가격! 그리고 어차피 전개가 뻔한 헐리우드 액션 영화, 영어로 대충 듣고 스페인어 자막을 보면 내용 파악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잭 블랙이 나오니 Rock 음악이 나오겠지? 더 좋은건 아름다운 아만다 피트 까지!! 돈 때문에 하고 싶고 먹고 싶은거 대부분 못하면서 여행하고 있지만 오늘만은 영화도 보고 여기서 햄버거도 먹고 싶었다. 햄버거와 감자튀김은 아주 맛 있었다. '남미의 감자는 어딜가나 최고야!' 그런데 내가 시킨 세트메뉴가 아니다. 반쯤 먹다가 만 햄버거를 들고 카운터로 갔다. "이거 봐요, 내가 시킨 햄버거가 아니잖아요. 저기 4번 세트에 있는 햄버거네요. 그냥 먹을테니 가격차이 만큼 돈 주세요." 일부러 그랬는지 실수였는지 모르지만 일부러 그랬다면 사람 잘 못 고른거다. '나, 예전의 멍청하고 바보같은 내가 아니거든?'

영화는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래도 아만다 피트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거의 20년 전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KISS의 'Rock N' Roll All Nite'와 GNR의 'Sweet Child of Mine' 그리고 Guitar Hero 게임까지... 역시 잭 블랙의 취향을 영화에서 배려해 주었다. 안 좋았던건 '사운드'. 왜 이렇게 작고 음질은 라디오 음질인지. 좋았던건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나올 때 극장 내 조명을 켜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지정좌석이 아니라는 것. 3D영화는 신기하고 재밌지만 결국엔 하드웨어를 따라가는 비슷한 영화가 계속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마치 아이폰 앱 처럼). 사실 지금 난 아무것도 모른다. 반년이라는 시간은 요즘 시대에 바보가 되기 충분한 시간이니까. 2D 영화가 주는 상상력과 표현력이 있기 때문에 모든 영화가 3D로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여행이 끝나고 볼 영화와 드라마가 산 처럼 쌓여있겠구나...

밤 11시쯤, 난 걸어서 숙소로 가고 있다. 20분 이상 걸어야 하는데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안전한 지역이지만 워낙 인적이 드물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알면 알수록 더 조심해지기 때문일까. 걸음은 빨라졌고 숙소 근처 광장이 눈에 보이는 순간 마음이 안정됐다. 오랜만에 혼자 돌아다녀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볼리비아를 유독 경계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난 남미를 너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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