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 Agustín, 하루만 더, 하루만 더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기 전에 만들어진 유적들을 잠깐 보려고 온 San Agustín. 그냥 흔한 관광지겠지 하고 생각했던 나는 5일째 이 곳에 머물고 있다. 싼 물가, 인심 좋은 사람들, 조용한 마을 분위기, 내가 좋아하는 곳이다. 나는 중심가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그리고 제법 높은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산 중턱에 숙소를 잡았다. 이렇게 가끔씩 EcoLodge 에 오면 반복되는 호스텔 생활에 지쳤던 마음과 몸을 쉬게할 수 있다. 당연히 이 곳에 딸려있는 레스토랑은 너무 비싸서 나가서 장을 보고 왔는데 왔다갔다 하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리고 힘들다. 그래도 주방도 있고 해먹, 그네도 있고 일어나면 말(馬)들이 앞에서 누워있는 풍경이 꽤 마음에 든다. 6시만 되도 어두워지는데, 하루 종일 조용한 이 곳은 인터넷까지 없어서 나에겐 더 좋다. 인터넷이 되긴 하지만 아주 느리기 때문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인터넷이 잘 되면 일기 쓰기도 소홀해지고 스페인어 공부 및 독서도 게을러진다. 핑계가 아니라 내 의지가 부족한 탓이다.

여기에도 투어가 많다. 특히 말타고 돌아다니면서 유적을 찾아가는 투어가 인기다. 하지만 난 어느 투어도 신청하지 않았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유적지는 그냥 포기했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곳만 혼자 산책처럼 돌아다니기로 했다. 첫 날은 가장 유명한 공원에 가서 시간을 보냈는데, 생각보다 유적은 많이 없었지만 가을을 느낄 수 있는 공원 풍경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

두 번째 날은 보통 말타고 4시간 투어하는 코스를 혼자 걸어보기로 했다. 네 곳의 유적을 찾아 떠난 길은 처음에는 무척 즐거웠다. 새들이 날개를 푸덕이는 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조용한 산골을 걸으며 유적을 찾아가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커피를 포함해서 수 많은 농장들의 풍경이 펼쳐졌는데 커피농장투어를 포기한 것을 여기서 만회한 기분이었다. 커피를 따고 있는 아저씨, 아주머니들과 이야기를 하고 직접 커피도 마셔봤다. 이게 꽤 재밌어서 보이는 곳 마다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 맛을 비교하기까지 이르렀다. 인심 좋은 마을 주민들은 나를 볼 때 마다 말을 걸고 내 스페인어가 바닥 날 때까지 붙잡아 둔다. 이렇게 정겹고 즐거웠던 산책은 마지막 유적을 보기 전 부터 조금씩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5시간 이상 산 길을 걸은 탓일까, 더군다나 마지막 유적지에서는 도저히 마을로 가는 길을 못 찾겠다. 다행히 마지막 유적 근처에 앉아있는 한 할아버지가 보인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도저히 할아버지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 그냥 길을 물어본건데 왜 이렇게 알아듣기 힘들지. 결국 할아버지가 몸으로 직접 설명까지 해 주셔서 대충 이해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러고 나서도 다시 마을 중심가로 가기까지 두 시간은 걸린 것 같다. 흐려진 하늘은 엄청난 장대비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난 비도 피할겸 한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내가 콜롬비아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음식이다. 다양한 과일들과 길거리 간식은 기본이고 식당에서 먹는 점심메뉴는 어디를 가도 기본 이상의 맛을 보장하고 양은 넘쳐난다. 7시간 이상 산길을 걸었다. 마지막엔 조금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 느꼈다는 기분이 매우 좋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히 내가 여행자고 이상하게 생긴 동양인이라 관심을 가지고 다가온 사람들이지만 나에겐 모든 대화의 기억이 소중하다.

같은 방을 쓰는 스페인 청년 Ian은 시원스러워서 좋다. 내가 스페인어를 이해할 줄 안다고 좋아하지만, 난 아주 일부분만 알아들을 뿐이다. 더군다나 Ian은 친절하게도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하기 때문에 조금 더 알아듣기 쉽다. "내년 3월에 스페인 오기 전에 꼭 메일 보내줘. 우리 동네로 초대할게." 벌써 스페인에서 만날 사람이 두 명이네. 다행이다. 스페인은 정말 아주 준비도 없이 갈 생각이었으니까.

Mexico, San Cristobal de las Casas 에서도 그랬지만 지금 여기서도 '하루만 더'가 계속 되고 있다. 정말 신기한건 San Cristobal을 좋아했던 여행자는 모두 똑같은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하루만 더'(검소하게 여행하기로 유명한 일본 여행자들도 여기에 오래 머물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지금 여기에서도 난 그렇다. Bogotá 같은 대도시도 계속 붙잡아두는 매력이 있는건 분명하지만 아무래도 물가 싸고 인심 좋은 사람들이 많은 마을에서는 도대체 떠나기가 쉽지가 않다. 더 아쉬운건 산장에 머무느라 마을 구경을 제대로 하지 못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고 싶던 시장도 못 갔고 마을을 떠날 때 보이는 풍경들을 보니 내가 큰 실수를 한 마냥 가슴이 멍해진다. 차 타고 가기 싫어서 포기 했던 이웃 마을도 이렇게 이쁠수가 있나.

어떤 사람에게는 지루하고 지저분한 기억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다른 추억이 남아있다면 그게 바로 여행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 떠나면서 아쉬워서 아이폰으로 몇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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