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나 좀...

'똑똑'. "혹시 저희랑 같이 나가서 저녁 먹을래요?". 바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희들, 여행 초짜구나. 혼자인 나를 챙겨주는거 보니'. 내 예상은 맞았다. 남2, 여2 프랑스 친구들은 이제 여행 3일째. 난 나가서 먹을 계획은 원래 없었지만 보이시한 프랑스 여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만 따라가고 말았다. 우리는 광장 근처 노점에서 1,500원 짜리 식사를 하고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오는 피자집으로 갔다. 인디오 아저씨들의 흥겨운 음악에 맞춰 우리는 자정까지 술을 마시며 즐겼다. 때로는 현지 아가씨 혹은 아주머니들과 같이 신나게 춤을 추기도 하고 밴드 아저씨들과 재밌는 얘기를 나누었다. 카메라랑 아이폰을 두고와서 사진을 못 찍은게 후회될 정도로. 그런데 나중에 계산할 때 보니 한 친구가 무려 $40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팬티 속에 넣어둔 돈이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지나치게 경계하거나 감춰두면 오히려 큰 구멍이 생기는 것일까?

다음 날은 남미에서 가장 큰 인디오 장이 열리는 토요일, 바로 이 곳 'Otavalo'에서. 평일에도 이 곳은 커다란 푸드마켓과 수공예품장이 상시 있지만 토요일은 마을 전체가 상점으로 가득 매워진다. 론리 플래닛은 남미에서 꼭 해야 할 TOP 10 중에 오타발로 시장을 두 번째로 꼽았을 정도다. 예상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특히 인디오 여인들의 전통 복장, 즉 어두운 계통의 치마와 이쁜 무늬가 있는 흰 블라우스 그리고 환상적인 금목걸이는 지금까지 본 어떤 의상보다 나에겐 아름다웠다. 망원 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가졌다면 정말 하루 종일 사진만 찍고 싶었을 정도로. 하지만 난 구경하고 선물사는데 집중하느라 사진 자체를 거의 찍지 못 했다. 난 좀 무리해서 부모님과 친구를 위한 선물을 여기서 샀다. 물론 나를 위한 목걸이, 팔찌등도 샀지만. 당연히 가게를 막 열게되는 시간과 거의 닫을 때가 가장 싸게 구입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그 예상은 대충 맞았다. 난 아침 7시 전 부터 돌아다녔는데 상점들은 첫 손님인 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왜냐면 그들에겐 첫 손님이 물건을 사는게 행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 돌아다니다보면 더 싸고 좋은 물건을 찾는 재미가 생기기도 하고 가끔씩 스페인어에 능숙한 아주머니들과의 흥정은 이 곳에서 일주일을 돌아다녀도 지겹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의 많은 인디오들은 그들의 언어, Quichua만 할 줄 알기 때문에 가끔은 소통에 힘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난 구입한 물건들을 방에 두려고 숙소로 돌아왔다. "수, 이제 가축시장 보러 갑시다". 60세 캐나다 할머니 Liz. 그녀는 전 날 나를 보자마자 붙잡고 놓아두질 않았다. "어제 밤 자정에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잤어요. 주인 아주머니와 스페인어로 한 남자가 계속 말을 하던데. 그래서 오늘 물어보니 당신이 들어왔다더군요. 콜롬비아에서 왔다면서요? 내 일정에 도움 좀 주겠어요?". 그래서 어제는 그녀에게 몇 시간 동안 여행정보를 설명해 줬는데, 예민하고 초조한 성격의 그녀는 같은 얘기를 수십 번 반복하게 만든다. 물론 덕분에 아주 싸고 맛 있는 숨은 식당도 같이 가고 커피와 차를 챙겨줘서 고맙기도 했지만. 아무튼 우리는 같이 가축시장에 가서 재밌는 구경을 하고 당연히 거기서 아침을 먹었다. 스페인어가 아주 훌륭한 인디오 아저씨와의 대화, 어디가나 현지인들과의 대화는 즐겁고 정겹다. 내가 바로 여행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Liz는 오후에도 나의 쇼핑을 도와줬지만 그녀는 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하기 시작한다. 계속 물어보고 확인하고. 그녀는 작년에도 남미 여행을 했었고 올해도 벌써 반년 이상 여행하고 있다. 그리고 당연이 몇 십년 전 부터 세계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자원봉사 프로그램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콜롬비아로 가는 비행기표 취소문제, 에콰도르 비자 연장문제 그리고 콜롬비아에 대한 불안감으로 신경과민인 것 같다. 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그녀에게 수백번은 반복해서 얘기해야 했다. 그녀는 말끝마다 "아??" 하고 재차 확인하는 습관이 있는데 처음엔 아무 느낌 없었지만 3일 내내 계속 들으니 나도 조금 힘들어 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늘 일요일에도 고맙게 아침까지 차려주고 커피와 차를 대접해줬다. 오늘도 그녀는 나에게 근처 마을 Cotacachi로 가자고 제안한다. '휴, 오늘은 그냥 혼자 놀고 싶은데...'. 그 마을은 가죽제품 거리로도 유명하고 마을 자체도 아주 이뻐서 좋긴 했다. 하지만 가고 오는 버스 그리고 식사할 때를 포함해서 계속 자기 걱정을 털어놓은 반복되는 대화에 난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항상 싱글룸을 고집할 정도로 예민한 성격이다. 다른 여행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 자체에 스트레스를 느끼고 버스가 불안해서 대부분의 이동은 비행기로 한다. 하지만 평소에는 대단히 경제적이다. 일본 여행자들 만큼이나 아껴쓰는 그녀, 심지어 점심을 먹다가도 남은게 있으면 싸가서 저녁에 먹을 정도다. "수, 당신을 만나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혹시 당신 여행에 지금 필요한 물건 있나요?". "아뇨, 필요한거 전부 다 있어요. 아직 소매치기를 당한 적이 없어서요".

'똑똑'. "혹시 저희랑 같이 저녁 먹을래요?". 내가 항상 부러워하는 큰 눈의 아가씨가 내 방으로 왔다. "저와 친구가 주방에서 스프를 만들고 있어요. 괜찮으면 같이 먹을래요?". "아, 방금 막 저녁을 먹긴 했는데...". "아! 혹시 콜롬비아 뽀빠쟌 온천에서 우리 만나지 않았어요?". 난 그 온천에서 혼자 놀다가 그녀들이 왔을때 거의 바로 돌아갔기 때문에 기억이 잘 안났다. 더군다나 모두 수영복 차림이어서. "아! 그렇군요. 그때 거기... 이렇게 다시 만났네요". "저흰 미국에서 왔어요". "전 한국". "하던거 마무리 하고 주방으로 올라오세요. 같이 얘기 나눠요". "네, 바로 올라 갈게요". 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잘생기거나 아름다운 것일까. 그녀들과 얘기를 하러 난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수! 이것 좀 봐요! 도대체 난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여기 와 봐요!".

'아... 할머니, 나 저 아가씨들과 놀고 싶단 말이에요!!! 제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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