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더 머물게 된 산 페드로, 가장 편안하고 즐거웠던 날

새벽 4시에 일어났는데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도대체 30시간 연속으로 비가 올 수 있는거야? 어쨌든 짐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마쳤는데, 모든 버스의 운행이 중단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도로의 많은 부분이 유실되서 지금 이 곳에서는 버스로 나갈 수 없다. 나가려면 배를 타고 파나하첼 까지 가서 거기서 또 버스를 타야 하는데 비용도 많이 들고 거기서 버스를 타고 Xela 까지 간다는 보장도 없다. 오늘 꼭 Xela 로 가서 일요일까지 쉬면서 스페인어 레슨 준비를 하고 싶었는데 말이지. 참담한 기분으로 숙소 앞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데 쿠바 아바나에서 친구가 됐던 '타쿠야(Takuya)'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달 만에 다시 만나게 됐는데 너무 반가웠다(페이스북으로 연락은 하고 있었지만). 타쿠야는 어제 도착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도로가 끊겨 3-4km 를 비 맞으면서 산 페드로 까지 걸어왔다고 한다. 타쿠야는 새 숙소를 찾고 있었고 난 타쿠야에게 내가 지내던 옥상방을 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가능하면 오후에라도 Xela 로 갈 계획이었고 안되면 더 싼 1층 방에서 지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 오늘은 갈 수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비를 맞으면서 마을 구석 구석 산책을 하고 오후에는 로베르토, 타쿠야와 같이 Santigo de Atitlan 마을로 보트를 타고 갔다. 어제 가려고 했지만 폭우 때문에 못 갔던 마을, 이 곳에는 인디오장이 있고 평소에도 수공예품 쇼핑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사실 난 쿠바에서부터 전혀 쇼핑을 하지 않았는데(산끄리스또발에서 200원도 안하는 팔찌 하나 산게 전부), 오늘은 바지를 하나 사고 싶었다. 타쿠야는 가족 및 친척들에게 보낼 선물들을 많이 샀고 난 바지, 조그만 목걸이 지갑, 팔찌 몇 개를 샀다. 한 번 사기 시작하니까 자꾸 이것 저것 사고 싶어진다. 이 곳은 흥정이 필수인데, 돈 많은 여행자들이 자기네들 기준에는 너무 싸서 부르는 그대로 사는 모양인지 결국 가격은 반 이하로 떨어진다. 처음에는 조금 황당했지만 갈수록 흥정이 재밌어진다. 물론 귀찮을 정도로 쫓아오면서 물건을 팔려는 아주머니들도 많고, 아이들의 악세사리 판매전략과 영어 솜씨는 오히려 서글플 정도였다. 오후 5시쯤 마지막 보트를 타는데 비가 그쳤고 우리는 보트 앞에서 아름다운 호수 풍경을 보면서 돌아왔다. 오늘은 여기와서 처음으로 외식을 했다. 우리는 맥주 한 병씩 마시면서 2시간 동안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사실 여행자들이 만나면 하는 얘기는 대부분 비슷하다. 기본적인 신상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해서 여행 정보 공유, 서로의 나라에 대한 얘기들, 비슷한 관심사에 대한 얘기 등등. 길지 않은 이 만남이 의외로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타지에서 같은 여행자로서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오래 만난 친구처럼 친근함이 생기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언제나 이별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짦은 순간에 여러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언제까지 계속 연락하게 될 지 모르지만 로베르토, 타쿠야는 두 번씩 우연히 만났는데 먼 훗날 다시 볼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전에는 그렇게 떠나고 싶어하더니 이제는 내일 떠나는게 아쉽다. 내일부터는 또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준비해야 한다. 난 지금 여행을 통해 조금씩 성숙해 지고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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