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신고식

인천-나리타 2시간, 나리타에서 약 8시간 비행을 해서 벤쿠버에 도착했다. 

입국 심사관들을 보고 가장 까다롭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골라서 줄을 서야 하는데, 빨리 나가서 쉬고 싶은 마음으로 아무데나 서서 기다렸는데 정말 깐깐한 젊은 백인 남자. 내가 서 있는 줄이 가장 오래 걸린다. 이제 내 차례.

"안녕하세요, 캐나다에 왜 왔나요?"

"네, 오늘 밤에 쿠바로 가기 위해 들렀습니다."

"쿠바요? 쿠바는 왜 가는데요?"

"그냥 배낭여행인데요."

"... 그럼 쿠바 간 다음에는요?"

"쿠바에서 멕시코로 와서 과테말라, 그 다음에는 콜롬비아부터 아르헨티나까지 여행합니다."

"왜... 그 곳들을 가는겁니까?

"예전부터 쿠바랑 중남미는 꼭 여행하고 싶었던 곳이었습니다."

"음... 돈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제 돈으로 가는건데요."

"알겠습니다."

그러고 Declaration Card에 X 표시와 이상한 표시들을 한다. 나는 나가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빠져 음침하고 살벌한 건물로 들어갔다. 갔더니 나 처럼 온 사람들이 보인다. 전부 한국사람을 포함한 동양인들이다. 심사관이 나를 부른다.

"어디서 왔습니까?"

"한국, 서울이요."

"캐나다에는 왜 왔나요?"

"오늘 밤 비행기로 쿠바 여행 갑니다."

"티켓 있습니까?"

"네, 여기요. 그리고 쿠바에서 멕시코, 중미에서 남미 이동, 남미 빠져나가는 티켓 여기 다 있어요."

"목적이 뭡니까?"

"그냥 배낭여행 입니다."

"음... 그럼 직장을 관뒀겠네요. 직업이 뭐였습니까?"

"컴퓨터 프로그래머, 웹 프로그래머 입니다."

"경비는 어떻게 마련합니까?"

"제 돈으로 갑니다."

"지금 현금 얼마 있나요?"

"쿠바에서 환전할 캐나다 달러 XX, 비상금 미국 달러 XX 있습니다."

"그거 가지고 여행을 다 해요?"

"아뇨, 나머지는 각 나라에서 은행현금카드로 뽑아서 쓸 건데요."

"통장에 얼마 들어있는데요?"

"달러로 치면 XX 있어요"

"떠나기전 부모님과 살고 있었나요?"

"지금은 그렇죠."

"음... 배낭 안에 물건들 좀 다 봐야겠습니다."

65L 배낭과 보조 배낭의 모든 짐을 다 검사했다. 나오는 책, 프린트종이 하나하나 다 설명해야했다. 의심할 만한 물건이 안 나오자 다시 짐을 쌌다. 30분은 걸린 것 같다.

"남미 이후 여행지는 어디 입니까?"

"스페인, 모로코, 이집트 그리고 집에 갑니다."

 - 이집트 부터 중동, 이란, 인도, 네팔등 원래 계획대로 말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던가요? - 별 걱정을 다 하네;;

"제가 여행 떠나니 심심할 것이라면서 서운해 하시죠."

"그렇겠죠, 당신은 직업도 없는데..." - 이 자식 자꾸 서럽게 하네ㅎㅎ

"내가 회사를 관둔 거라니까요! 그리고 프로그래머는 6개월, 1년 쉬고도 다시 일하는게 어렵지 않아요." - 이건 내가 생각해도 좀 ㅋㅋ

"... 알겠습니다. 이제 저기에 Declaration Card 내시고 나가시면 됩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고 짜증났는데 생각해보니 편도입국인데 바로 당일 쿠바로 출국하고, 머리는 삭발에 생긴건 범죄형, 거기에 어리숙한 영어. 사람에 따라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인 것 같다.

머리 길었을 때는 성실하고 순해 보인다는 얘기 많이 들었는데, 괜히 삭발해서 이 고생이다. 앞으로 계속 편도 입국인데 계속 이렇게 고생할 것 같다. 특히 콜롬비아 입국이 가장 걱정된다.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해야겠다.

여행 시작부터 신고식을 호되게 치뤘다. 생각보다 나약한 나, 포기하지 말고 계속 이겨내면서 강해지고 싶다.

668 views and 9 responses

  • Jul 20 2010, 11:43 PM
    charlieseo responded:
    나 영국 입국할때는 비행기 처음 타봐서 그런지 기압때문에 귀도 아프고 영국발음 못알아들어서 나도 꽤 긴 talk 를 했던 기억...
    콜롬비아는 너 옛날 폭탄헤어스타일 좋아할거야...
    콜롬비아 축구영웅 발데라마 스탈...
  • Jul 21 2010, 2:11 AM
    chu responded:
    아니.. 난 한번도 이런거 물어본적이 없었는데..
    저런식의 입국 심사는 나라마다 다른가???
    암튼.. 아 좋다 좋아. 정말 떠났구나. 아 글구 영어는 갈수록 이게 더 들리더라.. 참 신기해.
  • Jul 22 2010, 7:17 AM
    주희 responded:
    와 진짜 까다롭게도 물어보네요. 남의 직업에 부모님까지 걱정해주는 오지랖...;;;
  • Jul 24 2010, 3:46 AM
    chu responded:
    혹시나 새로운거 올라왔나 했는데. 아직 없네.. 잘 다니고 있겠지?
  • Jul 25 2010, 7:54 AM
    younghwan responded:
    잘하고 있냐? 나도 해봐서 알지만.. 외로움이 가장큰 적이지.. 잘해내라..
  • Jul 25 2010, 7:35 PM
    nortika (Twitter) responded:
    새로운 글 올라왔나 해서 와 봤어요~ 재밌는 글 많이 올려 주세요.. 물론 힘드시겠지만 ^^;; 모쪼록 건강 조심하세요~
  • Jul 25 2010, 11:56 PM
    with09 (Twitter) responded:
    쿠바는 잘 도착했냐... 잘 돌아보고 잘 지내고 있겠지?
  • Aug 3 2010, 6:52 PM
    세도 responded:
    즐거운 출발이구나 ㅋㅋㅋ나도 미국, 캐나다 그쪽 사람들한텐 쿠바가 별로(?)인가봐, 나도 미국서 나고 자란 친척한테 쿠바가고 싶어한다고 얘기했더니, 이해를 못 하더구나 ㅋ
  • Aug 4 2010, 5:30 AM
    landnfreedom (Twitter) responded:
    이렇게도 댓글이 가능하구나... 무식한... 하여간 연락이 계속 뜸해서 들여다보곤 하는데 댓글만 느네? 두번째 댓글다신 분은 내가 아는 분인가??? 인터넷 되면 사진도 올리고 그래라, 쿠바라고 구석기시대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