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와 이별, 가장 두려운건 웃음을 잃는 것

어두운 비행기 안은 조용하다. 모두들 다양한 자세로 자고 있고 꺼지지 않은 스크린속의 영화만이 유일한 불빛이다. 난 잠에서 깨어났고 승무원들이 걷는 모습이 마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카타르 도하까지 18시간, 그리고 인천공항까지는 이제 몇 시간 안 남았다. 비행기 안에서만 거의 30시간을 보낸 셈이다. 헤드폰을 끼고 클래식음악을 듣고 있다. 생각보다 비행은 피곤하지 않았지만 승객의 99%가 한국사람으로 채워진 도하 부터는 마음이 불편했다. 내 옆자리에는 왠만하면 먼저 말을 거는 나도 그냥 무시해버릴만큼 불쾌한 사람이 있었고 무슨 일인지 일부 한국승무원들은 울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한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어떻게 했길래. 아니, 그런데...... 나 이제 한국에 거의 다 왔구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의 한 시골마을 Estancia에서의 꿀맛같은 휴식이 끝나자 마자 난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기고 공항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이제 후회나 미련같은 감정은 나에게 고민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감정인지 설명을 못 하겠다. 슬프기도 하고 조금은 설레이기도 하다. 분명한건 기쁘지는 않았다는 것. 이번 여행의 끝이 더 슬픈지 아르헨티나와의 이별이 더 슬픈지도 모르겠다. 난 이미 떠나기도 전에 한없이 그리워한 곳들이 많았으니까. 그리고 나와 3개월을 함께한 친구와도 여행의 이별을 할 순간이다. '그러고보니 선물하나 못 사줬구나... 못난 놈'

선배가 반차를 내고 공항으로 마중나왔다. 형을 만난지 15년이 됐네. 도대체가 변하지 않는 형의 인생,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제 난 달려졌을텐데 느낄 수 있어? 물론 내가 두려워하는 것도 있다. 다시 웃음을 잃고 이 답답한 회색도시에 떠밀려 사는 것. 돈을 벌어야 하니 어떻게든 일은 하겠지만 다시 말이 없어지고 웃음을 짓지 않을까 두렵다. 아니, 10개월 동안 변한 내 모습대로 사람들에게 다가갔을 때 혹시나 나에게 올 상처가 있을 것만 같고. 이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아직도 30시간을 비행해서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왔다는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집에 도착하니 밖에서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다. 난 달려가 포옹을 했다. 술취했을 때 빼고 내가 언제 아버지와 이런 포옹을 했었지? 그리고 집에 들어선 순간 주방에 있던 어머니가 달려와 내 얼굴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신다. 그리고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같이 울었다. 학창시절에 집을 나갔을 때도, 제대했을 때도 이런 적이 없는데 다 늙은 아들 남미에 보내고 얼마나 마음 고생을 하신걸까?

마음 편한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짐을 정리했다. 금요일밤이구나, 주말까지는 푹 쉬자. 침대에서 책을 읽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새벽 3시에 눈을 떴다.

무슨 꿈을 꾸었을까...여기가 어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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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y 10 2011, 11:10 AM
    Angie responded:
    예전부터 계속 포스팅 보고있었습니다. 저는 고작 작년에 2주동안 남미 여행이라고도 할 수 없는 '방문' 을 하고 또 가고 싶은 마음을 다른 분들의 여행기를 위안삼아 보고있었거든요. 여행이 끝나셨다니 제가 다 아쉽네요. 기간도 기간이니만큼 적응하시는데도 시간이 걸리시겠지만 아무리 회색도시에서 우울하게 살아도 웃음 잃지 않으시길 바랄께요.
  • May 10 2011, 10:45 PM
    HolaSu responded:
    이번여행은 끝났지만 몇 년 안에 다시 갈거에요. 같은 방식은 아니고 다른 형태의 여행으로.. 여행일기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