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함을 느낄 때

아띠뜰란 호수 마을에서 Xela 로 온 이번 주는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어딘가 텅 빈 한 주였다. 여행 전 부터 등록했던 스페인어 학원 Celas Maya 는 $35나 수강비를 인상했고, 홈스테이를 했던 집은 부담될 정도로 부자집이었다. 그리고 교육의 질도 예상대로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비록 학원에서 재밌는 추가활동들과 관심있었던 분야의 컨퍼런스가 있어서 좋았던 부분도 많았지만 한 주 더 다니기엔 교육의 질에 비해 가격이 너무 부담됐다. 뭐랄까, 겉은 제대로 꾸며놓았고 시스템도 잘 갖춰져있지만 속은 너무 부실하다고나 할까. 돈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여행자들에겐 상관없겠지만 나는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20를 깍아줄테니 한 주 더 다니는 것을 권했던 매니저의 제안을 거절하고 토요일에 TAKA House 로 갔다. TAKA 아저씨의 집인데 역시 일본인 호스텔이다. 여기를 통해서 학원과 홈스테이를 신청하면 Celas Maya 의 절반 가격으로 한 주를 보낼 수 있고 무엇보다 TAKA House 에서의 생활도 맘대로 할 수 있어서 좋다. 산 끄리스또발 데 라스 까사스 에서 만났던 친구들도 있었고 대부분 일본인 호스텔은 정겹고 친절해서 적응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내일부터 홈스테이를 하니 한 두끼 식사를 위해 장을 볼 수도 없어서 저녁식사를 하러 혼자 나가서 피자 두 조각을 먹고 들어왔더니 TAKA 아저씨가 저녁식사를 하라고 부른다. 식탁에 가 보니 호스텔에 있는 모두를 위해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내가 쌀을 사고 반찬을 사는데 돈을 보탠 것도 아니고 요리를 도와준 것도 아닌데. 맛 있는 쌀밥, 닭찜, 버섯국 등 과테말라에서 먹은 식사 중 가장 행복한 식사였다. 토요일만 이런 것일까? 아니면 저녁은 항상 이렇게 먹는 것일까? 모르겠다. 식사 후 설겆이를 도와주고 별을 보며 일본 친구들과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나는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 음악 등을 오래 전에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일본 친구들과 대화를 시작할 때 무리가 없다. 일주일 만에 다시 마음의 평온함을 느꼈다.

오늘 오전에는 이 곳에 장기체류하고 있는 히로꼬 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며칠 뒤면 과테말라 독립 기념일인데 TAKA House 도 한 자리를 내어서 수공예품을 팔고 팔씨름 경기도 주최한다고 한다. 히로꼬는 수공예품을 만들고 있었다. 일본 덧신을 비롯해서 많은 옷과 악세사리등을 만드는데 솜씨가 좋은 것 같다. 일본과 한국은 서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모르는 것도 많고 또 의외로 서로의 문화에 관심도 많다. 그래서 한 번 대화를 시작하면 꽤 오래가서 좋다. 히로꼬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타입이다.

오후에는 Xela 에 와서 처음으로 산책을 했다. 이번 주에 지냈던 그 부자집은 중심가에서 꽤 먼 거리였고 지난 산사태 때 쪼리 신고 배낭 두 개 들고 두시간 가까이 산을 넘은 이후로 오른쪽 발등쪽이 조금 안 좋아서 학원과 집만 왔다갔다 했었다. 역시 당연히 먼저 들러야 할 중심가의 공원. 그리고 공원 근처 시장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TAKA 아저씨의 친구라며 말을 먼저 걸어왔고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계속 얘기를 나누었다. 아니 이럴수가! 그래도 한 주 공부하고 말을 계속 했더니 확실히 좋아지긴 했구나. 당연히 전 보다 듣기능력이 좋아졌고 말할때의 문법 및 단어 선택도 훨씬 다양해진 것 같다. 기분이 좋아졌다. 더 열심히 해서 지금의 영어보다 훨씬 나은 정도까지 해 보고 싶었다. 어려운게 아니다. 왜냐면 난 영어를 진짜 못 하기 때문이다. 약국에 가서 발등 통증을 설명하고 알약 하나를 먹었고, 공원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하며 간단한 얘기들도 나누었다. 오늘은 일요일, 오후인데 비도 오지 않는다. 여행지에 도착해서 가야 할 곳, 봐야 할 것들을 챙겨서 바쁘게 뛰어다니기 보다 이렇게 느긋하게 마을을 느끼는게 너무 좋다.

저녁 식사 전에 짐을 챙겨서 홈스테이 할 집으로 갔다. 다행이다. 훨씬 서민 냄새가 느껴지는 집이다. 이번 주에 생활했던 부자집은 마치 한국 TV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집이었다. 하지만 공부하기에는 오히려 여기가 더 마음에 든다. 아늑하고 책상도 있고 문을 열면 바로 하늘이 보이고 마을이 보여서 좋다. 할머니가 차려주신 저녁식사도 마음에 든다. 부자집에서는 식사가 너무 성의없었다. 아니 요리를 거의 하지 않고 대부분 음식 혹은 컵라면을 사와서 줬다. 물론 가정부(당연히 인디오)가 차려주는 점심은 매우 좋았다. 아이들도 정을 주기엔 지나치게 부담스러웠다. 세련되고 개인주의적인 것을 내가 이해하고 다가갔어야 했는데 어느 선 이상은 못 하겠더라. 하지만 여기는 아주머니와 아이들도 친근하고 부담이 없다. 물론 돈이 많고 잘 사는 것과 조금 부족하게 사는 것이 사람까지 판단하게 해 주지는 않지만 전혀 영향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아무튼 비싸고 잘 갖춰진 Celas Maya 생활을 버리고 다른 곳을 선택한 내 판단은 일단 잘 된 것 같다.

아직도 자주 꿈을 꾼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나오는 꿈. 꿈 속에서는 내가 한국에 있다고 느끼고 깨어나면 깜짝 놀란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다. 왜 그럴까? 무의식 속에서 나는 사람들을 그리워 하는 것 일까? 아직 여행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 한 것일까? 여행 중에는 너무나 편안할 때도 있고 불편할 때도 있고 불안할 때도 있고 외로울 때도 있다. 어느 한 감정과 느낌만 계속되지 않기에 여행은 매력적이지만 나에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건 편안함이다. 몸이 편하다는게 아니라 마음의 편안함. 내가 견디기 힘든건 그리움 보다 외로움인데 오늘처럼 마음이 편안하면 외로움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이번 주에는 처음으로 엽서를 사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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