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문
오늘 이 자리에 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1년 6개월 동안 아버지에 대해 많은 글을 썼지만 정돈된 내용으로 다시 쓰려니 머리와 마음이 더 복잡하네요.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추도사에 더해 우리 가족의 희망, 앞으로 살아갈 의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저희 가족은 마지막 일주일 아버지의 모습이 임종 직전 증상이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날, 아버지는 시간이 다 됐음을 아셨는지 어머니에게 “당신이 제일 보고 싶을 거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오가 지나고 집에 온 저도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마자, 어제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침대 위 천장쪽에 누가 있는 것처럼 바라보면서 약간 거친 호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급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지가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모든 것을 다 마련해 주셨기에 우리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했고, 아버지는 힘든 호흡 속에서도 “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한 곳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듯 어머니 손을 꼭 잡은 채 영면하셨습니다.
저는 그 후 며칠 동안 제발 한마디만 더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단 5분만이라도 다시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울었습니다. 아버지는 예전에 저를 포옹하면서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마지막까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임종 전 날 까지 화내고 막말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 때문에 아들이 신경쓰는게 싫어서 많은 것들을 감추셨고, 본인은 싫어도 언제나 제가 내린 결정을 존중하고 따라주었습니다. 또 울부짖었습니다. 왜 힘들다고 말을 안했냐고,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나에게 더 의지하지 그랬냐고.
이처럼 아버지는 다른 사람 심지어 가족에게까지 신세지는 행동을 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모든 사람을 위해 친절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저는 배웠습니다. 내가 준 만큼 받는 것을 계산하는 것 보다,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최대한 베풀고 희생하면 결국 궁극적인 성공과 행복이 온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삶의 마지막도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면서 고요하고 아름답게 눈을 감으셨습니다.
때늦은 후회를 하는게 인간입니다.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부재에서 깨닫는 현실이 너무 슬픕니다. 다행히 전 아버지에게서 ‘무상’을 보았습니다. 무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하여 시간의 지속성이 없음을 말합니다. 석가모니가 무상을 직시하라고 한것은,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현실을 인지하고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가꾸고 정진하라는 철학적 메시지입니다. 하루 하루 달라지는 아버지 얼굴을 보면서 문을 닫고 돌아서는게 힘들었고, 집에서 자다가 아버지를 지금 당장 보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아 새벽에 일어나 집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계속 변화하고 영원하지 않은 무상이 보이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지속하기 때문에 소중한건 없으니까요. 임종 몇 주 전, 집에서 밥먹고 있는 제 모습을 소파에 누워서 엷은 미소로 계속 바라보시던 아버지도 저에게서 무상을 보신 것 같습니다.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고 계속 저를 바라보면서 짓던 아버지의 그 미소는 평생 기억날 것입니다.
이제 다른 사람들을 봐도 각각의 인생이 다 소중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죽음은 한 인간이 아닌, 한 세계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현대사의 드라마 같았던 아버지의 인생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제 제가 챙겨드리면서 더 신나게 살 날만 남았는데 아버지 답게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늙는다는 착각을 평생 하지 않으셨듯, 임종 직전까지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다가 가족 옆에서 편안하게 떠나셨습니다. 10대 초반에 서울로 올라와서 60년 넘게 원없이 일하고 즐겨서 후회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지는게 아니라 피기 위해서 태어나는 꽃같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같이 웃고 행복했던 추억을 되새기며 슬픔을 극복할 수 있고, 가족끼리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 곁에서 계속 살아있게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목소리 듣고 싶고 보고 싶을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와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일 얘기 사는 이야기 하고 싶은데, 같이 여행 다니고 싶은데 이걸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아버지를 대신 할 수 없기에 더 답답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하는게 사별 후 인생일까요.
아버지는 몸에서 반응하는 것을 제대로 느끼고 판단할 줄 아셨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이라고 해도 이런 아버지의 감각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투병생활 내내 통증이 없어서 그랬는지, 전체적인 몸 상태가 삶의 종착점을 향해 가고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고 파악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병원이 아닌 집에서 가족과 마지막 시간을 보냈네요. 제가 경험하면서 느끼고 공부했던 것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도움을 줄 것입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 자식, 형제 자매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충분히 표현하고 나중을 위해 사진도 자주 찍어야 겠다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후회 없는 인생은 없지만 최대한 줄일 수 있습니다. 부재 후에 느끼지 말고, 오늘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간직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마치 우리는 영원히 살 것 처럼, 먼저 떠난 사람이 불쌍하다고 슬퍼하고만 있지 않겠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가 있고 우리 모두 같은 길을 가게 될테니까요.
마지막으로 소설가 헨리 밀러의 에세이 중 일부를 읽으면서 끝내겠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건강을 유지하고 여전히 산책을 즐기며 식사를 맛있게 한다면
약을 먹지 않고도 잠을 잘 잔다면
꽃과 새, 산과 바다에 여전히 마음이 동한다면
당신은 참으로 운 좋은 사람이니 아침저녁으로 무릎 꿇고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당신을 세상에 내놓은 죄를 저지른 부모를 용서할 수 있다면
크게 성공하지 못해도 하루하루 만족하며 산다면
과거의 일을 잊어버릴 뿐만 아니라 용서할 수 있다면
점점 더 심술궂고 독하고 냉소적으로 되지 않을 수 있다면
당신은 확실히 멋진 인생을 살고 있다
이제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하루하루 행복하게 그리고 베풀면서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